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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도입 전에 물어야 할 것: ERP 를 바꿀 일인가, 앞뒤를 붙일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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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오랩스 대표·8분 읽기

AI 기능이 들어갔다는 업무 시스템으로 갈아탔습니다. 반년이 지났는데 현장에서는 여전히 거래처 카톡을 읽어 엑셀에 옮겨 적고 있습니다.

흔히 AI 도입을 "AI 기능이 들어간 제품을 사는 일"로 이해합니다. 그러면 위 상황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제품에는 분명히 AI 가 들어 있는데 사람이 하던 일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살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 회사에서 AI 가 일할 자리가 어디인지부터 정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패키지에 들어갈 수 있는 일과 없는 일

회계, 급여, 4대보험 신고, 전자세금계산서. 이 업무들은 전국의 모든 회사가 같은 양식으로 합니다. 법과 제도가 그렇게 정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역은 기성 솔루션이 압도적으로 유리합니다. 월 2만원대부터 시작하는 가격에 법이 개정되면 그것까지 따라옵니다. 이걸 맞춤으로 만들자는 제안은 나쁜 제안이고, 대개 발주하는 쪽에서도 압니다.

패키지가 성립하는 조건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수만 개 회사가 같은 방식으로 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 번 만들어 모두에게 팔 수 있습니다. 그러니 패키지에 없는 기능은 만드는 회사가 게을러서 없는 것이 아니라, 회사마다 달라서 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구분이 이 글의 전부입니다. 부족한 것과 담을 수 없는 것은 다릅니다.

AI 가 잘하는 일의 공통점

거래처가 보낸 카톡 문장에서 품목과 수량을 뽑아내기. PDF 로 온 견적서 읽기. 들어온 문의를 성격별로 나누기. 회신 초안 쓰기.

이 일들의 공통점은 정해진 양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사람이 읽어야만 알 수 있었습니다. 규칙으로 적을 수 없으니 프로그램으로 만들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일들은 패키지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거래처가 주문할 때 쓰는 말투와 옆 회사 거래처의 말투가 다르고, 우리가 받는 견적서 양식과 저쪽이 받는 양식이 다릅니다.

AI 가 잘하는 영역과 패키지가 담지 못하는 영역이 같은 자리입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둘 다 "표준화되지 않았다"는 같은 성질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그래서 AI 를 실제로 쓰려고 하면 자연스럽게 우리 회사 전용으로 만드는 쪽으로 밀려갑니다.

지금 사람이 옮겨 적고 있는 것

그 자리를 찾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지금 사람이 손으로 옮겨 적는 일을 세면 됩니다.

가장 흔한 것이 발주 접수입니다. 거래처 주문이 카톡, 문자, 전화, 이메일, 엑셀 파일, PDF 로 제각각 들어오고 담당자가 그걸 읽어 품목명과 수량을 맞춘 뒤 ERP 에 다시 입력합니다. 그래서 재고가 꼬이는 원인이 ERP 가 아니라 입구에 있다는 진단이 나옵니다. 재고 화면만 바꾸면 같은 문제가 반복됩니다. 시스템을 갈아도 입구를 그대로 두었으니 재입력도 그대로 남습니다.

제조업이라면 작업일보, 비가동 기록, 교대 인수인계가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ERP 는 일과 주와 월 단위로 도는 시스템이고 현장은 실시간이라, 그 사이가 종이와 화이트보드와 엑셀로 채워집니다.

현장에서 확인할 질문 둘을 드립니다. ERP 에 넣기 전에 카톡이나 엑셀을 거치는 일이 무엇인가. 그리고 지난달에 ERP 에서 엑셀로 내려받은 파일이 몇 개인가. 내려받은 엑셀의 개수가 곧 지금 시스템이 담지 못한 일의 개수입니다.

저는 이 목록이 AI 도입 계획서보다 먼저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목록이 짧으면 도입할 것도 없습니다.

되는 일과 안 되는 일

기술 쪽을 짚고 가겠습니다. 지금 수준에서 맡길 수 있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 꽤 분명하게 갈립니다.

맡기는 일 맡기지 않는 일
비정형 문서에서 항목 뽑기 금액 확정
분류하고 태그 붙이기 승인과 결재
요약과 회신 초안 재고 수량 확정 반영
비슷한 과거 건 찾아 주기 거래처에 직접 발송

오른쪽이 안 되는 이유는 정확도가 낮아서가 아닙니다. 틀렸을 때 되돌리는 비용이 크기 때문입니다. 초안이 틀리면 사람이 고치면 그만이지만 발송된 견적은 회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계에서 정할 것은 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니라 틀렸을 때 누가 걸러내느냐입니다. AI 가 앉을 자리는 사람을 대신하는 자리가 아니라 사람 앞에 초안을 놓아 주는 자리입니다. 확인하는 자리를 없애면 비용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류가 늦게 발견될 뿐입니다. 모델의 출력을 그대로 믿지 않고 코드로 검증하는 이야기는 출력을 검증하는 법에서 따로 다뤘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업종마다 다릅니다. 정확도가 어느 정도 나오는지는 다루는 서류의 양식과 품목 체계에 달려 있어서, 저도 일반화된 숫자를 말할 수 없습니다. 실제 서류 몇 장으로 먼저 재 보는 것 말고 방법이 없습니다.

아껴지는 것을 사람 수로 세지 않는 이유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이 몇 명을 줄일 수 있느냐입니다. 이 단위로 재면 계산이 잘 맞지 않습니다.

실제로 줄어드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재입력 건수, 두 시스템을 대조하는 시간, 틀린 것을 나중에 발견해 되돌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들은 한 사람이 온종일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하루에 조금씩 흩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다 합치면 상당한 시간인데 아무도 그만두지는 않습니다.

사람 수로 약속하고 도입하면 반년 뒤에 실패로 기록됩니다. 아무도 그만두지 않았으니까요. 세는 단위를 바꾸는 편이 정확합니다. 하루에 옮겨 적는 건수와 건당 걸리는 시간, 매달 대조에 쓰는 시간, 오류로 되돌린 건수입니다.

사용자당 과금도 같이 봐야 합니다. 위하고는 월 2만원에 사용자당 3천원, 상위 요금제는 월 3만원에 사용자당 6천원이 붙는 구조입니다. 사무직만 쓸 때는 저렴한데 현장과 배송 인력까지 계정을 줘야 하는 순간 계산이 달라집니다. 그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조회와 입력뿐이라면, 그 부분만 따로 만드는 쪽이 나을 수 있습니다.

ERP 를 바꾸지 않아도 되는 이유

여기까지 오면 답이 하나로 모입니다. 표준 업무는 패키지가 낫고 비정형 업무는 패키지가 담지 못합니다. 둘 다 참이라면 기성 ERP 는 그대로 두고 앞뒤를 붙이는 것이 맞습니다.

붙일 수 있는지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참고로 "이카운트에는 API 가 없다"는 흔한 오해입니다. Open API 가 공개되어 있고 거래처와 품목 등록, 견적과 수주와 판매 입력, 발주 조회, 생산 작업지시, 근태 출퇴근, 재고현황까지 덮습니다. 추가 요금도 없습니다.

한계는 다른 데 있습니다. 원하는 메뉴가 그 목록에 없으면 거기서 끝납니다. 그래서 실무에서는 API 와 엑셀 업로드를 섞어 쓰고, 그것도 막히면 화면을 긁는 방식까지 동원됩니다. 쓰고 있는 솔루션이 무엇을 열어 두었는지가 붙일 수 있는 범위를 정합니다.

그러니 AI 를 도입할지부터 물을 일이 아닙니다. 지금 사람이 옮겨 적고 있는 일의 목록을 먼저 만들고, 그중 몇 개가 지금 쓰는 솔루션 밖에 있는지 세어 보는 쪽이 먼저입니다. 그 목록이 짧다면 바꿀 것도 붙일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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