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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의 스킬: 화면을 만드는 능력보다 사람을 읽는 능력

작성자
듀오랩스 대표·9분 읽기

기획자 채용 공고를 하나 열었다고 해 봅시다. 우대 조건 칸에 Figma, MOS(문서작성), 카피라이팅, 리서치 툴이 나열돼 있습니다. 이 목록을 다 갖추면 좋은 기획을 할 수 있을까요. 도구를 다룰 줄 아는 것과 무엇을 만들지 아는 것은 다른 질문이라, 이 공고는 뒤쪽 질문에는 답하지 않습니다.

도구 목록이 답하지 못하는 질문

디자인 씽커이자 인지과학자인 도널드 노먼은 이렇게 썼습니다.

Design is really an act of communication, which means having a deep understanding of the person with whom the designer is communicating.

디자인은 소통 행위이고, 소통하려면 상대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문장입니다(Goodreads). 기획도 같습니다. Figma로 화면을 그리고 카피를 잘 쓰는 것은 이해한 것을 꺼내 보이는 일이고, 무엇을 꺼내야 하는지는 다른 능력이 정합니다. 저는 기획자의 스킬을 표현하는 도구와 이해하는 능력, 이 두 층으로 나눠야 목록이 뜻을 갖는다고 봅니다.

UI/UX 밑에 있는 학문, HCI

UI/UX는 표현하는 도구 쪽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뿌리는 이해 쪽입니다. HCI(Human-Computer Interaction, 인간-컴퓨터 상호작용)는 사람이 시스템을 어떻게 인지하고 조작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고, UI/UX는 그 연구를 화면 위에 적용한 결과에 가깝습니다.

이 연결을 만든 사람이 다시 노먼입니다. 1993년 애플에서 자신의 직함을 User Interface Architect에서 User Experience Architect로 바꾸면서 "user experience"라는 말을 처음 직함에 올렸습니다. Human Interface나 usability라는 말이 너무 좁아서, 산업 디자인부터 그래픽, 인터페이스, 물리적 조작, 설명서까지 사람이 시스템과 겪는 경험 전체를 부르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UI/UX라는 도구가 원래 HCI라는 이해의 학문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뜻입니다.

HCI 연구와 UI/UX 실무가 갈라지는 지점

HCI는 학회에 논문을 내고 가설을 세우고 실험으로 검증하는 학문입니다. UI/UX 실무는 그 결과를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다음 주에 화면을 출시해야 하는 기획자는 논문 대신 이미 검증된 원칙, 예를 들어 버튼이 크고 가까울수록 빨리 누른다는 피츠의 법칙이나, 사람이 한 번에 일고여덟 개 정도만 기억한다는 밀러의 법칙 같은 것을 도구처럼 가져다 씁니다.

저는 이 태도, 감이 아니라 검증된 원칙에 기대는 태도가 HCI에서 UI/UX가 물려받은 진짜 유산이라고 봅니다. 원칙 하나하나를 외우는 것보다, "이것도 검증된 것인가 내 감인가"를 매번 묻는 습관이 더 오래갑니다.

심리학이 실제로 하는 일

"심리학"이라는 단어가 스킬 목록에 오르면 막연하게 들립니다. 실제로 기획에서 쓰이는 것은 사람이 왜 예측 가능하게 비합리적인지를 설명하는 몇 가지 알려진 경향입니다. 손실 회피가 대표적입니다. 사람은 같은 크기의 이득보다 손실에 더 크게 반응합니다. "지금 가입하면 1만원 할인"과 "지금 가입 안 하면 1만원 손해"가 숫자는 같아도 반응이 다른 이유입니다.

기획자가 심리학 논문을 직접 읽고 실험을 설계할 필요는 없다고 저는 봅니다. 다만 이런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화면 문구 하나를 고를 때 그 경향을 의식하느냐 안 하느냐는 결과를 가릅니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시험받는 순간

기획자는 같은 내용을 최소 세 번 다르게 말해야 합니다. 개발자에게는 "이 값이 비어 있으면 기본값을 쓴다"처럼 조건으로 말해야 하고, 디자이너에게는 "이 상태에서는 버튼이 흐리게 보인다"처럼 화면으로 말해야 하고, 고객에게는 "재고가 없으면 알림을 보내드립니다"처럼 결과로 말해야 합니다.

세 문장은 같은 규칙을 말하고 있지만 단어와 순서가 다 다릅니다. 저는 이 능력이 언어능력과는 다른 능력이라고 봅니다. 언어능력이 정확하고 매끄러운 문장을 만드는 능력이라면,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같은 사실을 듣는 사람에 맞춰 다른 문장으로 바꾸는 능력입니다.

언어능력과 카피라이팅이 다른 지점

이 둘도 자주 하나로 묶이지만 다른 능력입니다. 언어능력은 문법이 맞고 오해의 여지가 없는 문장을 만드는 능력이고, 다국어 서비스라면 번역투 없이 자연스러운 문장을 만드는 능력까지 포함합니다. 카피라이팅은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정확함을 조금 포기하더라도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강하게 남는 문장을 고르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언어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쓴 카피가 밋밋하게 읽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확한 문장과 남는 문장은 다른 목표를 향하기 때문입니다.

문서작성이 여전히 스킬 목록에 남아 있는 이유

이해하는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그 이해가 한 사람의 머릿속에만 있으면 조직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회의에서 합의한 내용은 회의실을 나가는 순간 각자 다르게 기억되고, 문서로 남지 않은 결정은 다음 미팅에서 다시 논쟁거리가 됩니다. MOS로 대표되는 문서작성 능력은 그래서 표현 도구 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화면은 못 그려도 협업 도구가 대신 그려 주지만, 결정을 문장으로 정확히 남기는 일은 아직 사람의 몫입니다.

다섯 가지 스킬이 갈리는 두 축

앞서 나온 스킬들을 이 두 층으로 나누면 이렇게 정리됩니다.

스킬 하는 일
표현하는 도구 UI/UX, 문서작성(MOS), 카피라이팅 이해한 것을 화면과 글로 옮긴다
이해하는 능력 심리학, 커뮤니케이션, 언어능력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하고 말하는지 읽는다
둘을 잇는 것 HCI 사람과 시스템이 만나는 지점을 연구한다

여기에 하나 더할 것을 추천합니다. 데이터를 읽는 능력입니다. 이해가 관찰과 대화에서만 나오면 그 관찰을 한 사람의 감으로 끝나지만, 전환율이나 이탈 구간 같은 숫자로 뒷받침되면 다른 사람을 설득할 근거가 됩니다. 예를 들어 "이 버튼 색이 눈에 안 띄는 것 같다"는 감상은 회의에서 반박당하기 쉽지만, "이 버튼의 클릭률이 다른 버튼의 절반이다"는 숫자는 반박하기 어렵습니다. 카피라이팅이 언어능력의 응용이듯, 데이터 리터러시는 심리학과 커뮤니케이션이 만든 가설을 검증하는 도구에 가깝습니다.

스킬들이 서로를 대신하지 못하는 이유

여기까지 나온 여섯 가지는 서로 독립된 축입니다. 카피라이팅을 잘하는 사람이 꼭 심리학을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카피는 좋은 문장을 골라내는 능력이고, 심리학은 그 문장이 왜 통하는지를 설명하는 능력이라 방향이 다릅니다.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사람이 꼭 데이터를 잘 읽는 것도 아닙니다. 말을 상대에 맞춰 바꾸는 능력과 숫자에서 패턴을 찾는 능력은 다른 근육을 씁니다.

저는 이 독립성이 왜 기획자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스킬을 요구하는지를 설명한다고 봅니다. 한 축이 강하다고 다른 축이 따라오지 않고, 약한 축 하나가 전체 결과물의 병목이 됩니다. 카피는 강한데 데이터를 못 읽으면 그럴듯하지만 안 팔리는 문구가 나오고, 데이터는 잘 읽는데 커뮤니케이션이 약하면 맞는 결론을 냈는데도 아무도 그 결론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독서와 학습이 이 목록을 살아있게 만드는 이유

표현하는 도구는 버전이 바뀌면 새로 배우면 됩니다. 이해하는 능력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어떤 말에 설득되는지는 시장과 세대가 바뀔 때마다 같이 바뀝니다. 작년에 통했던 카피가 올해는 안 통하는 이유는 카피라이팅 실력이 준 것이 아니라 그 밑의 이해가 낡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노먼이 1993년에 만든 그 직함은 이후 업계 전체의 표준 직함이 됐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가 그 이름을 붙인 이유, "사람이 시스템과 겪는 경험 전체"라는 정의는 화면 하나가 아니라 문서, 카피, 심리, 커뮤니케이션까지 다 아우르는 것이었습니다. 스킬 목록이 화면 만드는 도구로만 좁아질 때마다, 저는 이 원래 정의로 한 번씩 되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독서와 학습은 표에 없는 여섯 번째 스킬이 아니라, 위 다섯 가지를 계속 갱신하는 조건이라고 저는 봅니다. 심리학 책 한 권을 읽는다고 당장 좋은 기획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다만 읽기를 멈춘 사람의 이해는 거기서 멈추고, 시장은 계속 움직입니다.

이 능력들을 얼마나 갖춰야 좋은 기획자인지 정량화한 기준은 없습니다. 그래서 갱신을 계속하는 사람과 멈춘 사람의 차이는 당장 드러나지 않고,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벌어져 있는 채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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