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세 가지 질문: 당위성·고객·핵심요소
2012년, 협동 탐험 게임 글리치의 서버가 완전히 꺼졌습니다. 개발사 타이니스펙은 3년과 수백만 달러를 쏟아부었지만 게임은 충분한 이용자를 모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는 문을 닫는 대신 전혀 다른 제품을 냈습니다. 게임을 만드는 동안 팀이 흩어진 사무실끼리 소통하려고 직접 만들어 쓰던 사내 도구, 그것이 슬랙이 됐습니다(SitePoint).
세 질문에 각각 답하면 끝난다는 생각
기획서 양식에는 대개 목적, 타겟, 핵심 전략을 적는 칸이 따로 있습니다. 이 칸을 각각 채우면 기획이 끝났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저는 이 생각이 틀렸다고 봅니다. 세 질문, 즉 왜 해야 하는가, 누구를 위해서인가, 무엇이 성패를 가르는가는 서로 독립된 칸이 아니라 하나가 바뀌면 나머지도 다시 계산해야 하는 사슬입니다.
타이니스펙의 사례가 이걸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흩어진 채로 함께 일할 방법이 필요하다"는 당위성은 게임을 만들 때도, 슬랙을 낼 때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바뀐 것은 고객이었습니다. 이 도구가 필요한 사람은 게임을 살 소비자가 아니라 팀 내부에서 매일 소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위성은 그대로 두고 고객만 다시 짚었을 뿐인데 결과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왜 해야 하는가: 당위성이 없는 채로 시작하는 비율
당위성을 다룬 글에서 아이러브스쿨, 프리챌, 세이클럽, Quibi를 다뤘습니다. 이 넷이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라는 것은 CB인사이트의 조사로도 확인됩니다. 스타트업 실패 사례를 분석한 이 보고서는 "시장의 필요가 없었다"를 실패 원인 1위로 꼽았고, 그 비율이 42%였습니다(CB Insights 보고서 원문). 자금 고갈이나 팀 문제보다도 앞선 순위입니다.
이 숫자가 말하는 것은 아이디어가 나빠서 실패하는 경우보다, 애초에 그 아이디어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답 없이 시작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순서가 기획에서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아이디어의 참신함이 아니라 당위성의 존재 여부라는 근거라고 봅니다.
누구를 위해서인가: 당위성은 그대로 두고 고객만 다시 짚은 경우
타이니스펙의 전환이 특별한 이유는 당위성을 새로 만든 게 아니라 그대로 두고 고객만 재정의했다는 데 있습니다. 협업 도구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은 게임 개발 3년 내내 사실이었습니다. 다만 그 문제의식을 게이머에게 팔 상품으로 풀려고 했던 것이 틀렸을 뿐입니다.
고객을 다시 정의하는 근거를 찾을 때, 저는 인터넷에 도는 "명확한 타겟 고객이 있으면 이탈률이 몇 퍼센트 준다" 류의 통계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검색하면 비슷한 숫자가 여러 마케팅 블로그에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끝까지 따라가 봐도 실제 조사 기관의 원본 보고서로 이어지는 링크가 없습니다. 출처가 서로를 인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그 숫자 대신 슬랙처럼 실제로 확인 가능한 사례 하나를 근거로 씁니다. 통계 하나가 그럴듯해 보인다고 그대로 옮기면, 이전 글에서 걷어낸 출처 불명의 숫자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셈입니다.
무엇이 성패를 가르는가: 이 질문에는 이름이 있다
세 번째 질문, "무엇이 성패를 가르는가"는 임의로 만든 질문이 아닙니다. 경영학에서는 이것을 핵심 성공 요인(Critical Success Factor)이라고 부르고, 이 개념을 정립한 사람은 MIT 슬론 경영대학원의 존 F. 로카트입니다. 1979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실린 그의 논문은 경영진 인터뷰를 통해 "이 일이 잘되려면 반드시 갖춰야 할 소수의 요소"를 뽑아내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Harvard Business Review, 1979).
로카트의 핵심 통찰은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어떤 사업이든 성패를 가르는 요소는 소수이고, 나머지는 그 소수가 갖춰진 다음에야 의미를 가집니다. 프리챌은 당위성도 있었고 고객도 1,000만 명이 있었지만, 핵심 성공 요인, 즉 "공짜에 익숙해진 사용자를 이탈 없이 유료로 넘기는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전면 유료화를 밀어붙였습니다. 나머지 조건이 다 갖춰져도 이 소수의 요소 하나를 놓치면 전체가 무너진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세 질문이 사슬인 이유
이 세 질문을 순서대로 보면 이렇게 이어집니다. 당위성이 없으면 42%의 스타트업처럼 시작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당위성이 있어도 고객을 잘못 짚으면 타이니스펙이 게임으로 3년을 쓴 것처럼 방향이 엉뚱한 곳을 향합니다. 당위성과 고객이 맞아도 핵심 성공 요인을 놓치면 프리챌처럼 가장 잘나가던 순간에 무너집니다.
저는 이 셋을 기획서의 독립된 칸으로 채우는 순간 이 사슬이 끊어진다고 봅니다. 각 칸에 그럴듯한 문장 하나씩을 써넣고 나면 검토하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셋이 서로를 흔든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고객을 바꿨으면 핵심 성공 요인도 다시 물어야 하고, 핵심 성공 요인이 안 보이면 당위성 자체를 의심해야 합니다. 세 질문에 대한 답이 각각 있다는 것과, 그 답들이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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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의 본질: 돈을 버는 당위성을 지키는 일1999년, 카이스트 박사과정생이 150만원으로 사이트 하나를 열었습니다. 1년 만에 회원 500만 명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그 회사는 지분을 전부 팔아넘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아이러브스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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